
[뉴스써치] 법정스님은 쌍계사(雙溪寺)에서 효봉(曉峰)스님을 은사(恩師)로 사미계(沙彌戒)를 수계(受戒)하고 통도사(通道寺)에서 자운율사(慈雲律士)를 은사로 비구계(比丘戒)를 수계(受戒)하였다..
운허(耘虛)스님의 부름을 받고 불교사전 편찬(編纂)에 동참하였는가 하면 타고난 문재(文才)를 발휘하여 불교경전(佛敎經典)을 우리말로 번역하는데 뜻을 세웠다.
스님은 봉은사(奉隱寺) 판전(板殿)아래 다래헌(茶來軒) 편액(扁額)을 걸고 차맛을 알아갔으며 또 당대에 이름있는 문학지인 현대문학, 샘터, 씨알의 소리 등에 수필(隨筆)을 싣는 등 재기 넘치는 문필가(文筆 家)로서도 이름을 떨쳤다.
하지만 본인 스스로는 고행(苦行)길을 자처하여 해인사(海印寺)와 송광사(松廣寺) 선원(禪院)에서 수선안거(修禪安居)를 행하므로써 선승(禪僧)으로서 독서와 수행(修行)을 게을리하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길상사를 창건(創建)하고도 이곳에 당신의 처소(處所)를 두거나 하룻밤도 머물지 않았다.
또 회주(會主)는 맡았을지언정 주지(住持) 마저 사양했으며 법문을 위해 길상사를 찾을때도 주지의 처소인 행지실(行持室)에 잠시 머물다 가는 등 자기 자신에게는 야박하리만큼 철저하셨다.
스님이 입적할 때까지 조계종단(曹溪宗團)을 위해 총무원장(總務院長)등 큰 일을 맡아달라는 주위의 간곡한 권유도 끝내 사양하고 송광사 불일암(佛日庵)에서 그리고 강원도 오지(奧地)의 오두막에서 평생 무위정진(無爲精進) 하며 끝까지 무욕(無慾)의 삶의 사셨다.
떠나실때도 본인의 장례를 절대 호사(豪奢)스럽게 하지 말라는 평소의 유언(遺言)에 따라 평상시 입은 옷 그대로 화장(火葬)하여 강원도 오지의 오두막 부근과 순천 송광사 불일암(佛日庵) 그리고 길상사에 뿌려졌다.
이렇게 훌훌 바람처럼 떠나가셨으니 스님의 청정한 삶이야말로 그를 따르는 불자들과 함께 뭇사람들의 귀감(龜鑑)이 되고 있다.
스님은 전재산을 시주(施主)한 공덕주(功德主) 김영한에게 길상사 창건일에 맟춰 길상화(吉祥華)란 법명을 주어 작은 보답을 하였다.
길상사는 송광사 말사(末寺)로서 법정스님의 숨결이 곳곳에 오롯히 밴 청정도량(淸淨道場)으로 자리잡아 어느 때 어느 누가 찾아도 반가이 맞아주는 오늘의 명찰(名刹)로 거듭났다.

성북동 하면 산수(山水)가 좋고 풍광(風光)이 수려(秀麗)하여 유난히 시인(詩人), 묵객(墨客)이 많이 사는 아담(雅淡)한 동네였다.
김광섭(金珖燮 1904~1977)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로 잘 알려져있는 고즈넉한 산동네인 성북동은 옛부터 문학인(文學人)들과 깊은 연고가 있는 문향(文香)이 살아 숨쉬는 고즈넉한 마을이었다.
조선조 후기 문신(文臣)인 채제공(蔡濟恭1720~1799), 규장각(奎章閣)학자(學者)인 이덕무(李德懋1741~1793), 서예 대가인 추사 김정희( 秋史 金正喜1786~1856)가 성북동에 와서 시문(詩文)을 지어 자연을 노래했다.
동농 김가진(東農 金嘉鎭1846~1922), 무소같은 여인 김일엽(金一葉1896~1971)스님, 소설가 염상섭(廉想燮1897~1963) 등 문인들이 모여살아 문인촌(文人村)이라 불리워졌다.
1930년대에는 민족시인이며 3.1운동의 주역인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1944) 선생이 입적할때까지 머물렀던 심우장(尋牛裝)이 지금도 성북동에 잘 보존되어 있다.
또 청록파(靑鹿派) 시인 조지훈(趙芝薰1920~1868), 박목월(朴木月1916~1978), 박두진(朴斗鎭1916~1998)이 밤새워 청록집(靑鹿集) 발간에 힘을 쏟았던 곳도 성북동 조지훈 집이었다.
당시 성북동 문인들은 한국 추상(抽象)미술의 선구자인 수화 김환기(樹話 金煥基1913~1974), 화가 근원 김용준(近園 金瑢俊1904~1967),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尹伊桑1917~1995), 가곡 고향으로 낯익은 작곡가 채동선(蔡東鮮1901~1953) 등이 드나들며 깊이 교유했던 문기(文氣)가 깊이 배어있는 유서깊은 곳이기도 하다.

성북동은 개발이 더딘 것이 오히려 복이되었다.
어머님 품처럼 포근한 안식처(安息處) 같은 곳에 자리한 길상사는 크게 다듬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비교적 잘 보존된 요사채들이 주위 풍광과 어울려 아늑함을 선사한다.
절 중심에 극락전(極樂殿)을 위시하여 지장전(地藏殿) 적묵당(寂默堂) 선열당(禪悅堂) 청향당(淸香堂)등 수십채의 요사채들이 서로 이마를 맞대고 오가는 이들의 마음의 쉼터 역할까지 마다 하지않지 않는다. 그래서 친근감이 더하다.
반포성당(盤浦聖堂)의 첨탑(尖塔)위에 우뚝 서있는 닭을 조각(彫刻)한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서울대 명예교수인 최종태(崔鍾泰) 박사가 어느날 법정스님의 부탁을 받고 길상사에 관세음보살상(觀世音菩薩像)을 세운것 또한 보통의 인연이 아닐것이다.
최교수가 조각한 관음상이 성모상(聖母像)을 닮아 유명해졌는데 이 관음상은 천주교(天主敎)와 불교(佛敎)의 아름다운 만남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성상(聖像)으로 뭇사람들에게 회자(膾炙)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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